연평면의 유래
군민의 옹진, 뿌리를 찾아서 내가 사는 곳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법
연평면의 유래
군민의 옹진, 뿌리를 찾아서 내가 사는 곳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법
연평도에는 약 2천여 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때때로 도민을 괴롭히는 무리가 많아 여러 차례 무인도가 된 일도 있다.
조선조 16대 인조(仁祖) 때 명장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불모로 가 있는 세자를 구출하고자 상선을 타고 연평 바다를 지나던 가운데 식수와 부식을 구하려고 연평도에 기항하여 가시나무를 무수히 꺽어다가 지금 당섬 남쪽 ‘안목’에 꽂아놓고 간조 때 이름 모를 물고기를 무수히 포획하였다. 이 물고기의 이름을 석수어(石首魚)라고 불렀다. 석수어라 한 것은 물고기의 머리에 딱딱한 덩어리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것이 조기잡이 시초이다.
연평도는 조기잡이가 시작되면서부터 인구가 급증하였으며, 외래문화는 1910년대에 천주교인 전응택(佺應澤,바오로)일가가 입도하여 교회(공소)를 설립하면서 비로소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상당히 오래된 지명이 있는데, 모두 순 우리말인 ‘긴작시’ ‘뒷날래’ ‘대나루’ ‘덴짓물’ ‘가래칠기’ 등이 그 예이다. 이것은 옛날에 우리나라에 대한 중국의 내정간섭을 반대하던 이들이 이 섬에 피신하여 살 때 지은 지명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연평도는 본래 해주군에 속했다가 1938년 해주읍이 시(당시는 府)로 승격되면서 해주시 주위의 종전의 해주군 지역을 벽성군(僻城郡)으로 개편할 때 벽성군에 편입되었으며, 8.15 해방 후에는 38선 이남지역이므로 경기도 옹진군(擁津郡)에 편입되었다.
6.25전쟁 때는 수 만 명의 피난민이 이 섬을 거쳐 남하하였다. 휴전 후 연평도는 계속 대한민국에 소속되어, 인천항에서 정기 여객선이 왕래하고 있다.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으로부터 일곱 번째에 있고, 평평하게 뻗친 섬이라 하여 연평도라 하였으며 연평도에 따른 작은 섬을 소연평도라 부른다. 조선시대 임경업 장군이 조기를 발견한 후 어부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6.25때 참전해 용감하게 숨진 무명용사 6인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으며 이곳 주민들은 해마다 그들을 추모한다. 임경업 장군을 모시고 있는 충민사에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신사를 지으려다가 중단한 사유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니나나나타령이 구전되며 구룬나루 해변(구리동 해변)은 고운 모래로 유명하다. 꽃게가 씨알이 굵고 맛이 있어 인기가 좋다. 1959년 태풍 사라호에 의해 수많은 인명과 어선의 피해가 있었다. 꽃게잡이와 김양식, 자연산 굴 채취로 주 소득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