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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국가형성기 삼국시대, 통일신라고려시대

조선시대근대(개항기~일제시기)현대(해방이후 1970년대까지)
(가) 선사시대

한반도에서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40만년 이전의 구석시시대부터 거주하였고, 빙하기에 기온이 상승하면서 신석기시대가 되었고, 그 후 기원전 7-8세기 무렵의 청동기시대에는 벼농사가 도입되어 생산력이 발전하였고 이를 배경으로 고조선 등의 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구석기인들은 채집과 수렵, 어로활동으로 먹거리를 얻었는데, 불이 발견되지 않았을 때에는 생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이 발견되면서 익혀 먹게 되었다. 현재 발견되고 있는 구석기시대 동굴유적에 당시의 불 땐 자리가 남아있어 요리를 위해 불이 일찍부터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신석기시대가 되면 토기가 사용되면서 식품을 삶거나 찌고 졸이는 등 다양한 조리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 농경이 일반화되면서 곡물을 맷돌에 갈아 죽을 끓이거나, 시루를 이용하여 곡물을 쪄서 오늘날의 밥, 떡의 원시적 형태의 음식물이 등장하였을 것이다.

청동기시대 이후가 되면 곡물이 주식으로 이용되어, 벼는 늦어도 청동기시대 초기부터 재배되기 시작하였으나 일반민들은 보리, 조,수수 등을 주식으로 하였을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고구려인들은 술을 비롯한 발효식품을 잘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만주와 한반도에서 는 콩을 이용한 醬이나 기타 콩 발효식품이 애용되었다.  상단으로가기
(나) 국가형성기
국가 형태의 기원인 古朝鮮은 기원전 4세기 무렵 중국 연나라의 철기문화를 흡수하여 세력을 강화하였으나 漢武帝의 침입으로 기원전 108년경에 멸망하였고 夫餘, 高句麗, 沃沮 등의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하였으며, 이들 중 가장 강력한 존재가 高句麗였다. 한편 한반도 남부에는 三韓이 등장하였는데 후에 신라, 백제로 발전하면서 고구려와 함께 삼국시대를 이루게 된다. 상단으로가기
(다) 삼국시대 및 통일 신라

청동기 이후 철기시대에는 철제농기구 사용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국력을 키운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가로 성장하였고, 서로 간의 항쟁으로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켜 통일을 하였다.

『후한서』동이전에 의하면 “東夷사람들은 모두 마를 재배하여 먹는다”라고 하였고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는 “옥저는 고구려에 복속하여 (중략) 포목, 생선, 소금, 해산물을 천리나 지고 와서 바쳤다.”라고 하였으며 같은 ‘위지 동이전'에 “前漢의 武帝가 東夷를 쫒아 갔을 때 東夷가 놓고 간 젓갈을 보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해산물과 염장식품, 마 등과 같은 음식을 널리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북부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돼지와 같은 가축을 통으로 구워 먹는 방식으로 고기를 섭취하였는데 지금의 바비큐와 같은 방법으로 요리를 했다고 한다.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목축이 일찍부터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지』위지 동이전 등에 나오는데 이로 보아 고구려, 부여 계통의 사람들은 고기를 많이 섭취하였고, 고기를 굽는 요리를 貊炙(맥적)이라고 불렀다.

삼한은 저수지, 첨성대등의 발달로 벼농사가 성행하였고, 쌀을 이용한 음식을 먹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벼는 북부지역에서 받아들여 전파되었으나 남부가 상대적으로 벼농사에 유리한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어 많이 생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벼는 그 원산지 인도의 아셈 지방이고, 한반도에서는 중국을 통하여 벼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는 초기철기시대에 발달된 솥등으로 곡식의 가열 조리인 죽이나 원시적인 떡의 형태가 발달되었고 또한 화력보존을 위한 부뚜막의 발달로 지속적으로 섭취할 수 있는 주식인 밥이 발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기원전 10세기에 콩을 재배했던 유적지가 발견되었으며 콩으로 만든 장류가 보급되었고, 장을 이용하여 양념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철로 만든 솥이 널리 이용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고승 의상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진정법사는 출가하기 전에 집이 너무 가난하였는데 집안의 마지막 재산으로 다리가 부러진 쇠솥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솥은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솥을 이용한 취사가 보편화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음식물을 담는 그릇은 주로 나무로 만들었고, 귀족들은 유기(놋그릇)나 토기를 쓰기도 하였다.

고구려 무용총 고분벽화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승려인 듯한 손님을 대접하는 장면이 있는데 개다리상 위에 과일, 차, 밥 등이 차려져 있는 모습이고, 독상인 것으로 보아 귀족의 기본적인 관습이었던 것 같고 차가 이미 음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옥저는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소금이 생산되었고, 소금을 이용하여 채소를 절여 먹는 일종의 김치가 삼국시기에 등장하였다. 삼국시대의 김치에는 오늘날처럼 고춧가루와 젓갈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다. 고춧가루는 조선후기에 전래된 것으로, 고려시대의 이규보가 저술한 『동국이상국집』에 ‘소금에 절인 김치'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치는 채소를 소금과 적당히 버무려 만드는 비교적 간단한 음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된장도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이 사료에 등장하여,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에 장독들이 그려져 있어 각종 장을 보관하여 먹는 풍습이 삼국시대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된장은 발해에서도 애용되었는데 『신당서』에 발해 책성(柵城)지방의 특산물로 된장이 유명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의 신문왕이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일 때 보낸 혼수품에 쌀, 술, 기름, 간장, 된장, 포, 식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아 고기를 말려서 먹는 포와 식혜가 이 시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런 음식들은 주로 귀족들이 먹었고, 일반 백성은 흉년에는 나무껍질이나 나물, 도토리를 먹고, 평시에도 쌀 보다는 보리나 콩, 조를 주로 섭취하는 정도였다. 귀족의 식사는 밥과 국, 김치와 장을 기본으로 하고. 고기 등을 반찬으로 하였고, 이 때 우리나라 음식문화의 기본이 되는 김치가 널리 보급되었고, 밥과 국을 기본으로 하는 식습관도 고정된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단으로가기
(라) 고려시대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골품제라는 신분제도로 귀족 이외에 신분들에게 반감을 일으켜 8세기에서 10세기를 거치면서 내부적인 혼란과, 각 지방에서의 독자적인 세력인 호족에 의해 몰락하였다. 호족들 중에서 개성지방의 왕건이 호족세력을 통일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각지 호족의 포용등 여러 가지 사회 안정책을 시행하는 데에 주력하였고, 13세기에는 몽고족의 원에 복속되는 위치로 전락하였고 원이 멸망하면서 ‘신진사대부'라는 세력이 형성되어 새로운 조선왕조가 수립되었다.

삼국시대에 확립된 밥과 국이 보편적인 식사의 유형으로 정착되었다. 고려초에는 숭불의 사회적인 분위기로 고기먹는 습관을 절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의 풍습을 주제로 하는 『고려도경』을 저술한 서긍은 “고려의 정치는 심히 어질어 부처를 섬기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중략) 돼지와 양고기를 잘 먹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대신 채소요리에 대한 선호는 강하였다. 순무, 가지, 오리, 고사리, 도라지, 죽순 등으로 재배하는 채소의 종류가 다양해졌고 이로 인하여 소금에 절여 저장하는 김치의 종류도 다양해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무우를 장 속에 막아 넣어 여름에 먹고 소금에 절여서는 겨울에 대비한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장아찌와 동치미도 등장하였으며 각종 야생초를 김치와 같은 방법으로 버무려 먹는 관습도 있었다. 고려말 이색의 『목은집』에는 지금의 ‘김치'라는 단어의 직접적인 한자표기인 ‘沈菜(침채)' 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된장에 담근 오이장아찌'의 형태를 가진 것이었다. 이로 고려시대에는 장이나 소금에 절여먹는 야채의 종류가 다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치의 종류가 다양해졌지만 단순하게 소금에 절이는 정도가 일반적이었다. 또 현재 김치의 재료인 배추는 약용으로 쓰일 정도로 보편화되지 못하였다. 고려후기의 의약서인 『향약구급방』에 배추가 약용으로 소개된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야채류 음식의 증가와 음차가 확산되어 차와 관련된 도구들인 잔, 주전자 등 차와 관련된 도구등이 발달하였다. 조선후기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는 고려의 栗?(율갱)이 유명하였다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으깬밤에 꿀과 찹쌀을 넣은 것으로 중국에서도 유명하였다고 하고, 백설기, 경단 등의 떡이 등장하였다. 후기에는 원의 내정간섭을 받으면서 원의 음식문화를 많이 수용하여 만두 또는 찐빵의 모양을 한 霜花(상화)이다. 霜花는 고려속요로 유명한 「霜花店」의 소재로도 알려져 있다.

고려시기는 야채반찬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떡이나 꿀같은 다과류와 차문화가 발달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귀족들은 양고기와 같은 육류를 일부 섭취하였을 것이나 전체적으로 육류의 섭취는 종교적인 이유에서 보편적이지는 않았고 해산물이나 곡류를 섭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외에 고려시기에는 소주, 요구르트, 유밀과, 국수 등 현대인들에게 친숙한 음식이 전래되거나 만들어졌다. 상단으로가기
(마)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하여 성리학적인 사상에 기반하여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면서 검약과 절제를 중시하였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에 의해 사회적인 혼란을 겪었고, 다시 청의 침략을 받았다.
이후 안정을 되찾은 조선사회 내부에서는 신분제적인 질서가 점차 해이해지고 상업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적인 변화가 일어났으나 정치주도세력들은 성리학적인 질서를 고수하여 중국 이외의 나라에 대해서는 문호를 폐쇄하는 쇄국정책을 채용하였다.

조선시대에 사람들은 밥과 국을 기본으로 하는 식사를 하루에 두 번 먹는 것을 보통으로 여겼다. 때문에 식사를 의미하는 말로 ‘朝夕'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저술된 《청장관전서》에는 “우리 조선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5홉을 먹으니 하루에 한 되를 먹는 셈이 된다”라고 하여 하루 두끼의 식사가 보통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균관과 서울의 중등교육기관이었던 5부학당에서는 학생들에게 점심을 제공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점심은 “뱃속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간략하게 먹는 식사를 의미하는데 임진왜란 때에 오희문이 쓴 《쇄미록》에 의하면 낮에 간단하게 먹는 것을 ‘점심', 푸짐하게 먹는 것을 ‘오반'즉 ‘낮밥'이라고 하여 구분하여 놓았다. 일반적으로는 낮에 식사를 푸짐하게 먹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으며 이런 관습은 궁궐에서도 그대로 채용되어 왕도 점심에는 간식정도로 식사를 해결하였다고 한다. 지금처럼 하루에 세끼를 먹는 관습은 20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조선시대의 음식은 지금처럼 밥을 주식으로 하고 부식이 나오는 형태였고, 당시의 부식등이 오늘날 까지 전하는 전통음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밥은 모든 지역에서 쌀로써 밥을 지은 것은 아니어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남쪽 주민들은 대체로 쌀밥을 잘 지어먹고 북쪽사람들은 조밥을 잘 지어먹는다”라고 하여 지역적으로 주식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밥과 함께 가장 중요한 음식이 김치로 이 시기에 정착된 한국의 전형적인 식단차림은 뚜껑이 있는 그릇에 담겨 나오는 반찬의 가지수에 따라 3첩, 5첩, 7첩 등으로 나누고, 왕은 12첩반상을 먹었다고 한다. 첩수가 올라갈수록 점차 차림이 풍부해지기는 하지만 밥, 국, 김치는 필수적이며 첩수에는 계산되지 않았다. 김치는 처음 서양의 피클이나 일본의 쯔게모노와 비슷하였지만 조선후기부터 젓갈과 고춧가루를 쓰면서 그 맛이 독특해지기 시작하였고, 김치의 주재료는 무였다. 배추김치는 18세기말 중국으로부터 맛이 좋은 배추종자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담기 시작하여 20세기에야 보편화되었다. 조선전기까지는 후추, 생강을 쓰는 정도였으나 후추는 일반인들은 구하기 힘들었고, 조정에서도 일본이나 유구에서 종자를 들여오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 조선후기에 고추가 주로 많이 쓰는 향신료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기근이 들었을 때 솔잎, 소나무껍질, 도토리, 쑥 등을 구황식품으로 사용하여, 솔잎은 말린 다음 가루로 만들어 콩가루와 섞어서 죽을 만들어서 먹었다고 한다. 17세기 이후 고구마, 감자, 호박, 옥수수 등도 구황식품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었다.
조선시대에는 원칙적으로 사람마다 다른 상을 받는 독상이었고, 독상을 받는 관습은 신분에 관계없이 보편적이었고 양반가에서는 잔치에 쓸 목적으로 많은 수의 상을 보유하여, 상의 보유 개수는 집안의 경제력을 알 수 있는 정도로, 당시 식문화의 특성을 살필 수 있다.

한편 기호식품으로서 술은 종류가 200가지 이상으로 탁주, 소주가 많았고, 이 중 서민들은 탁주를 기호하였는데 이 술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누룩틀에 넣고 발로 밟아 누룩을 만들어 꼬들하게 찐 밥과 함께 독에 넣어 일정기간 동안 발효시켜 걸러낸 술이다. 소주는 증류주로 원에서부터 전래되어 이미 고려시기에 널리 퍼져 있었으나 주로 상류층이 이용하는 술이었다. 이렇듯 많은 종류의 술이 널리 애용되었지만 나라에 기근이나 홍수가 발생하면 금주령이 내려졌다. 상단으로가기
(바) 근대 (개항기 ~ 일제시기)의 역사와 식문화의 흐름

1876년 한국은 일본과 통상수교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었고, 1882년 미국에게 문호가 개방되면서 국제질서에 편입되었는데 이 때에는 서구적인 문물의 우월성으로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개화파는 봉건적인 사회와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다. 그러나 청과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결국 조선은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한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되었고, (1910) 식민지 동안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지배에 시달렸다. 특히 1930년대 공황과 중일전쟁으로 일제는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하였고 다량의 물자를 수탈당하였고,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끝나게 된다.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였고, 개항기 초기에는 생활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다가 점차 외국과의 통상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중국, 일본, 서구의 음식문화가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양 음식은 1880년대 무렵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서양제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기독교가 전래되면서부터였다. 당시 궁중에는 러시아 공사의 처형이자 손탁호텔의 경영자인 손탁이 민비와 친교를 맺으면서 서양음식이 많이 소개되었고 이를 계기로 고관들의 파티에 서양요리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음식 중에서 지금까지 한국인의 음식문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커피이다.
한편 1910년 한일합방으로 궁중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은 궁중을 나와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했는데 그 중 궁내부(宮內府)의 전선사장(典膳司長)이었던 안순환은 명월관이라는 요리점을 개설하여 기생들의 기예를 고객들에게 선보였다.

식사형태도 개항기 이전까지는 남자와 여자, 양반과 평민이 같은 상에서 식사할 수 없었고, 독상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학생들의 단체급식이 시행되고 신분의식이 희박해짐에 따라 신분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상에서 식사를 하는 관습이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일제에는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등의 일제의 수탙로 농민들은 빈곤에 식량부족현상을 겪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문화가 주입되었고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음식문화가 상당수 사라지게 되었다. 1917년에 발표된 酒稅令으로 집안에서 만들었던 술인 가양주와 지방의 전통적인 민속주도 상당수 사라지고 대량 생산한 술이 판매되었다.

일제시에는 보통 하루 3끼를 기본적으로 지켰으나 겨울에는 2끼만 먹는 경우도 있었다. 쇠고기, 돼지고시, 개고기를 즐겨먹었고 멸치, 새우젓, 조개젓이 대중적으로 애용되었다. 밥은 흰쌀밥이 거의 없었고 팥이나 콩, 조 등을 혼합한 밥을 먹었다. 상단으로가기
(사) 현대(해방이후 1970년대까지)의 역사와 식문화 흐름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은 미국과 소련이 각각 남과 북에 주둔하면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으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고 산업시설도 다수 파괴되었다. 이후 한국은 극도의 빈곤의 생활을 하였고. 1960년 4.19혁명과 1961년의 5.16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였고, 이 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여 1970년대까지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였고, 이 과정에서 한국은 급속한 근대화와 서구화를 경험했다.

해방과 함께 한국은 독립하였으나 식생활은 어려워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여야만 했다. 특히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다수의 경작지가 초토화되어 식량은 극도로 부족하였다. 전쟁 피해 복구단계에서 외국의 식량원조를 받았으나 계속되는 한발과 홍수로 흉작은 60년대까지 지속되었고, 당시 미국으로부터 다량의 밀가루가 원조되어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 많이 만들어졌고, 정부에서는 혼,분식 장려책으로 밀가루 중심의 식단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식량 부족을 보충하고, 국민 건강 증진 차원에서 정부는 ‘식생활개선'을 내걸고 쌀소비를 억제하고 균형잡힌 영양소 섭취를 위하여 우유와 빵, 유류제품, 감자와 고구마 등이 권장되었으나 일반인들은 재래음식에 대한 선호가 강하였다.

60년대 중반 이후에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서서히 서구식 식단이 도입되고 다양한 반찬과, 우유와 설탕, 통조림의 소비가 급격히 늘어나고 사이다, 콜라, 커피, 라면 등 가공음식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70년대에는 곡류, 감자, 콩의 소비가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육류, 생선, 계란, 채소, 과일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하고, 소세지 등 기름진 음식도 다량 소비되었고 햄버거 등 서구식의 간편한 음식도 점차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 중 육류 소비는 1961년 경 1인당 3.6kg이던 것이 79년에는 11kg으로 급증하였고, 이에 불고기집과 같은 음식점이 늘어났고 삼겹살 등의 육류 메뉴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상단으로가기

: 201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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